1983년 미그기를 몰고 귀순한 북한 공군 이웅평은 보로금 15억6000만원을 받고도 평생 한 푼도 쓰지 않았다. 통일이 되면 자신의 귀순으로 고통받았을 북의 가족에게 주려 남겨둔 돈이었지만, 누나는 정치범수용소에 갇히고 가족은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다. 그의 삶은 최근 SBS '꼬꼬무'를 비롯한 방송과 기록에서 다시 조명됐다.

1983년 미그기를 몰고 남으로 넘어온 북한 공군 이웅평은 정부로부터 보로금 15억6000만원을 받았다. 당시 고급 아파트를 약 78채 살 수 있는 돈이었다. 그런데 그는 이 돈에 평생 손을 대지 않았다. 이유는 단순하면서도 무거웠다. 언젠가 통일이 되면, 자신의 귀순 때문에 고통받았을 북의 가족에게 주기 위해서였다.
최근 SBS '꼬꼬무'가 그의 사연을 다시 꺼내면서 이 이야기가 화제가 됐다. 냉전기의 상징으로만 소비됐던 인물의 이면, 즉 화려한 환대 뒤에 가려져 있던 개인의 선택과 결말을 짚어볼 만하다.

거열 박
1954년에 태어난 이웅평은 북한 공군 조종사였다. 그의 마음을 흔든 계기로 알려진 것이 뜻밖에도 라면 봉지다. 북한 해변에서 우연히 주운 남한 라면 봉지에 적힌 문구가, 그동안 교육받아 온 남한의 모습과 현실 사이에 의문을 남겼다는 것이다. 작은 물건 하나가 세계관에 균열을 냈다는 이야기는, 당시 남북의 정보 격차가 얼마나 컸는지를 역으로 보여준다.
그는 1983년 2월 25일 미그-19 전투기를 몰고 서해를 넘어 귀순했다. 이날 오전 수도권에는 갑작스러운 공습경보 사이렌이 울렸다. 편대를 이탈한 북한 전투기 한 대가 기수를 남으로 돌려 북방한계선을 넘자, 우리 공군이 F-5 요격기를 발진시켰기 때문이다. 이 미그기가 수원비행장에 내려앉으면서 소동은 끝났고, 그 조종사가 이웅평이었다. 냉전이 팽팽하던 시절, 최신 전투기를 통째로 몰고 온 적군 조종사의 귀순은 그 자체로 거대한 사건이었다.
귀순 이후 이웅평의 삶은 개인의 것이 아니었다. 그는 대한민국 공군 장교로 임관해 뒤에 대령까지 진급했고, 공군대학에서 교관과 정책연구위원으로 일했다.
동시에 그는 '반공 아이돌'로 불릴 만큼 대중 앞에 자주 섰다. 한 해 약 900회의 공식 일정을 소화했는데, 이는 당시 대통령의 연간 일정으로 알려진 600회보다 많은 수준이었다. 그가 등장한 여의도 행사에는 150만 명이 몰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질 정도다. 보로금 액수는 자료마다 조금씩 다르게 전해지지만, 그것이 한 사람의 인생을 통째로 바꿔놓을 규모였다는 점은 분명하다.
남한에서 그는 새 가정을 꾸렸다. 부인과의 사이에 딸과 아들을 두었고, 공군에서는 1983년 소령으로 임관해 1995년 대령으로 진급했다. 겉으로 보면 안정된 삶이었다.
그가 돈을 남겨둔 이유는 끝내 이룰 수 없는 형태로 되돌아왔다. 세월이 흐른 뒤 그는 북에 두고 온 가족의 소식을 접했다. 누나는 정치범수용소에서 힘든 삶을 살았고, 가족들이 세상을 떠났다는 이야기가 전해졌다. 통일이 되면 가족에게 주겠다던 돈은, 정작 받을 사람이 사라진 뒤에도 그의 손에 남아 있었다.
돈을 쓰지 않은 선택에는 죄책감의 무게가 실려 있었다. 자신의 결단이 남은 가족의 삶을 무너뜨렸을지도 모른다는 부채감은, 아무리 큰 환대로도 지워지지 않는 종류의 것이다. 그가 보로금을 '자신을 위한 돈'으로 여기지 않았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웅평 자신도 오래 살지 못했다. 그는 1997년 간경화로 간이식 수술을 받았으나 거부 반응 등으로 건강이 악화됐고, 2002년 4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화려했던 환대와 개인이 감당한 상실 사이의 낙차가, 그의 삶을 오래 기억하게 만든다.
이웅평의 이야기를 더 살펴보고 싶다면 몇 가지 기록을 참고할 만하다.
거대한 사건으로 기록된 귀순이었지만, 정작 오래 남는 것은 큰돈을 앞에 두고도 끝까지 쓰지 않은 한 사람의 선택이다. 방송이 이 사연을 다시 꺼낸 이유도 액수의 크기가 아니라, 그 돈이 끝내 향하지 못한 곳에 있다.